두곡동 수성최씨(隋城崔氏)의 시조는 신라 경순왕 김부(敬順王 金傅)의 13세손이며 본래 성이 김씨인 최영규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남조전서에 재직하면서 보문각대경(寶文閣大卿)을 겸직하였고, 서경의 학도들을 맡아 가르쳐 그 명망이 높았다.
충렬왕 때 수주(水州) 일대의 풍속을 바로잡아 왕이 그를 최씨로 사성(賜姓)하고 수성백(隨城伯) 문혜공(文惠公)으로 하사하여, 이때를 시작으로 수성최씨 시조로 하고 있다. 수성최씨 주요 세거지로 가평군 북면 이곡리, 송탄읍 가재리, 송탄읍 모곡리, 포승면 내기리, 도곡리, 양감면 송산리, 오산시 두곡동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두곡동은 행정구역 개편 전에 ‘말여울’이라 불리던 곳을 1910년 일제 강점기 때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마유동(馬遊洞)으로 했다가 1913년경 총독부에서 다시 행정구역을 변경하면서 두곡동(斗谷洞)으로 개정해 지금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또한, 두곡동에는 최정린의 증조부 최차흥(1676~1732)묘와 22세 사천현감 최건혁의 묘가 있었다. 집성촌은 대개 사회적으로 유력한 양반, 유림 등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오면서 종가를 중심으로 선조의 제례, 상호부조를 통해 협동 단결함으로써 향촌 자치를 이루고 그 지역에서 권세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볼 때 두곡동의 수성최씨 집성촌은 산업화, 도시화 과정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전통문화의 뿌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농업 기반 사회가 무너지고 산업사회로의 변화 속에 우리나라 대부분 마을들이 그랬듯 이곳에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이 집성촌의 기능이 차차 약화되어 갔다. 다만 몇몇 후손들이 선산을 관리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유음덕 후필창(有陰德 後必昌)이란 말이 있다. ‘조상이 덕을 쌓으면 후손이 그 덕을 받아 반드시 번창한다’는 격언이다. 이는 두곡동 수청최씨 집안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조봉대부 동몽교관 최정린공의 지극한 효심과 마을 백성에게 보여 준 덕행이 후손에게 전해져 자손이 크게 번창하고 훌륭한 인물이 배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여겨진다.
진길장(陳吉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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