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 부평이씨(富平李氏) 시조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공을 세워 벽상공신에 채록되고 벼슬이 삼중대광에 오른 이희목(李希穆)이다.
부평을 관향(貫鄕)으로 삼기는 4세손 이정공(李靖恭 ?~1099)이 문하시중을 지내고 부평백(富平伯)에 책봉됨으로써 그 후손들이 지금의 부평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한편 이정공은 고려 문종 13년(1059)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남원부사(知南原府事)를 지냈으며 왕명으로 흥왕사(興王寺)의 비문을 써 올려 크게 칭찬을 받았다.
문종 16년(1082)에는 참지정사로 국사(國史)를 편찬했으며 1099년(숙종 4)에 이정공이 임종하자 숙종이 조위(弔慰)하는 교서를 내렸다. 1107년(예종2)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부평이씨가 오산 서동에 입향(入鄕)해 집성촌을 이룬 시기가 명확하지는 않으나 족보와 여러 문헌 자료를 살펴보면 병자호란 때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의 종사관으로 출정하여 험천(險川 : 지금의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숙종 33년(1707) 충신정려문과 함께 홍문관 부제학 추증이 내려진 이상재(李尙載1607~1637)가 서동에 장사지내진 것으로 볼 때, 사후(死後) 입향조(入鄕祖)로서 이때부터 정착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충신 이상재 행장을 공의 외손인 개성유수 송징은이 지었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충신 이상재는 1607년(선조40년)에 인천 남구 용현동(도장리)에서 태어나 1636년(인조14년)까지 살았으며,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부평(富平)이다. 자는 문거(文擧)이며, 옥(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정랑을 지낸 이계록(李繼祿)이고, 아버지는 광해군과 동서지간이 되는 군수 이덕일(李德一)이며, 어머니는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사복시 첨정 이인후의 딸을 맞이하여 혼인하였다. 1630년(인조8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33년(인조1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어 저작에 올랐다.
1636년(인조14년) 금정도찰방이 되었는데, 이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만주족이 명나라를 멸하고 세운 청나라의 왕 태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공격해 왔다. 임진왜란을 힘겹게 막아내고 30여년이 지나 잿더미에서 겨우 추스를 만 할 때 파죽지세로 남한산성으로 밀고 내려오는 청군을 막기 위해 충청도관찰사 정세규의 종사관으로 출정한다. 정세규는 이상재 선생의 사기가 충천하고 충성심이 강함을 인정하여 신임하고 군의 기밀 일체를 선생에게 위임한다.
이상재 선생이 용인을 지나 험천(險川 : 지금의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 땅에 이르러 날이 저물었다. 바로 그때 불시에 야간 습격을 받아 적군을 만나게 되니 모두 겁을 먹고 두려워하며 선봉이 무너지고 후진 쪽의 최진립 장군도 전사했고 선생은 급히 대장막사로 달려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정세규가 말하기를 “피하자.”하므로, 선생은 이 말을 듣고 분연히 말하기를 “어찌 이런 말을 하십니까. 신하는 마땅히 임금을 위해 죽는 것이 신하의 직분입니다.”하고 물러나 인신`관인을 마졸에게 주며 이것이 나라의 공기이니 네가 가지고 돌아가라 했다.
잠시 전에 아군의 수장이 또 적에게 패하여 겨우 몸만 탈출하니 패한 군사들이 적의 진중으로 투항해 들어가는 자 수백이었다. 선생이 크게 부르짖기를 “사나이가 죽을지언정 어찌 구차하게 살기를 도모하여 몸을 보존하려는가.”하니 도망가던 군사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선생은 언덕 위 양식더미 위에 올라가 활을 당겨 적을 쏘니 죽거나 다치는 자가 많았으므로 서로 경계하며 가까이 오지 못했다. 날아오는 화살이 연이어 어깨와 가슴에 맞았으나 선생은 태연히 화살을 뽑고 전과 같이 활을 당기었다. 그러나 화살은 떨어지고 힘은 다했는데 다시 적의 화살에 맞으니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선생은 인조 임금이 대피한 남한산성을 향하여 진군하다가 용인의 험천에서 적의 협공을 받고 전사한 것이다.
전란이 끝나고 인조의 특명으로 홍문관 교리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험천(용인 풍덕천)에서 전사하여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다가 다음 해(1637) 3월 관을 받들어 인천 도장리 선산에 가매장하였다가 그해(1637) 9월 오산시 서동 산 66-1번지에 장사를 지냈다. 묘역은 매봉산 남향능선 하단에 위치한 부평 이씨 선영 상단(정려문이 있는 구릉의 반대편으로 서동의 동촌과 서촌을 잇는 포장 소로의 우측 편)에 있다.
이상재 충신정려문은 숙종 33년(1707)에 정려가 내려졌으며, 영조 17년(1741) 왕의 특명에 의해 추가로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추증되었다. 정려각(旌閭閣)에는 예조판서 송면재(宋冕載 1764~?)가 순조 26년(1826)에 지은 정려기문이 함께 보관되어 있다.
이후 서동 부평이씨는 크게 번성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홍문관부제학 이상재의 아들인 이조참판 이세갑(李世甲1628~1702), 이세갑의 아들 이조판서 이정사(李廷師1650~1723), 이세갑의 차남으로 영조 대 노론의 중심인물인 조상경(趙尙絅1681~1746)의 장인인 형조정랑 이정태(李廷泰1652~1695), 대구판관 이정공(大邱判官 李廷恭), 중추부사 이성원(中樞府事 李聲元), 연천현감 이홍운(連川縣監 李鴻運), 절충장군 이붕운(折衝將軍 李鵬運), 만경현령 이주호(萬頃縣令 李周虎), 돈령부도사 이진원(敦寧府都事 李鎭遠), 중추부사 이선영(中樞府事 李善永), 직제학 이병만(直提學 李秉萬)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서동 부평이씨 집성촌에 관련된 내용은 1933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펴낸 『조선의 취락』의 기록에 의하면 28가구가 살았으며, 1957년에 발행된 『경기도지』에는 서리에 32가구 세대를 형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2010년 편찬된 부평이씨 족보에는 38세대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오산시 서동은 1950년대 전후로 권씨, 한씨, 김씨, 구씨가 마을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고 있으며, 현재도 농사를 주업으로 하면서 낙농과 과수 등 근교농업이 발달하였고 도로변을 중심으로 원룸, 유치원, 공장들이 들어섰고 아직도 자연마을 모습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오산시 서동 부평이씨 선산에는 충신 이상재 정려각과 이상재 묘를 비롯하여 그의 후손들의 묘가 한 묘역을 이뤄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서동 부평이씨 이법진 종친회장을 중심으로 해마다 가을이 되면 자손들이 모여 시제를 올리는 등 아직도 집성촌의 기능이 작동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2020년 7월 23일 오산시는 오산시 향토유적보호위원회 정기회의를 개최하여 오산시에 소재하는 4기의 문화재를 오산시 향토유적으로 지정하였다.
* 양산동 소재 봉학교비(한신대학교 박물관) * 지곶동 소재 방어사 변응성 선정비 * 서동 소재 이상재 충신 정려문 * 서동 소재 이상재 묘 등이다.
진길장(陳吉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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